1. 향 이름이 전부 장면이다
로에르 섬유향수의 향은 여덟 가지다. 벨벳 블라썸(구름 비누향), 시크릿 가든(토마토 장미향), 애프터눈 스트롤(우디 샌달우드), 피치 티 블룸(피치 블랙티), 유자 시트러스 패스(유자 자몽), 뮤게 베일(플로럴 스킨센트), 화이트 셔츠(클린 리넨), 선데이 브리즈(아카시아향).
이 목록에서 눈여겨볼 것은 향료 조합이 아니라 이름을 붙이는 방식이다. 화이트 셔츠는 향의 재료가 아니다. 선데이 브리즈도, 애프터눈 스트롤도 마찬가지다. 전부 냄새가 나는 순간의 장면이다. 향을 성분으로 부르지 않고 장면으로 부르는 브랜드는 생각보다 드물다.
시크릿 가든이라는 이름 아래 토마토 장미향을 넣은 것도 좋은 판단이다. 토마토 줄기를 만졌을 때의 풋내와 장미를 겹쳐 놓고, 그 조합을 비밀의 정원이라고 부른다. 향의 설명과 향의 이름이 서로를 보완한다.
2. 이 브랜드는 향이 아니라 냄새에서 출발했다
로에르 제품을 파는 곳은 수솝(SU:SOAP)이다. 수솝은 스스로를 반려동물 향기 케어 브랜드라고 소개한다. 사업자는 대구 북구의 수솝디퓨저캔들이고, 통신판매업 신고는 2013년으로 표기돼 있다.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집에서 향을 다뤄 온 브랜드라는 사실은 그냥 지나칠 이력이 아니다. 그 집에서 향의 첫 번째 임무는 좋은 냄새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냄새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에르 제품 설명에 지금도 펫프렌들리 추천 향, 저자극·오일프리 처방 같은 표현이 남아 있는 이유다.
그러니까 이 브랜드의 순서는 이렇게 읽힌다. 냄새를 없애다 → 냄새를 가리다 → 좋은 향을 입히다. 로에르는 그 마지막 칸에서 시작한 이름이다. 향수 브랜드가 흔히 갖지 못하는 출발점이다.
향을 파는 브랜드는 많지만, 냄새를 먼저 다뤄 본 브랜드는 많지 않다.
3. 그런데 로에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검색되는 상품명은 '수솝 로에르 센트 실내 디퓨저', '로에르센트 오 드 퍼퓸' 같은 식이다. 수솝과 로에르가 한 줄에 함께 등장한다. 그래서 로에르가 수솝의 제품 이름인지, 수솝이 만든 새 브랜드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로에르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페이지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왜 로에르인가. 이 이름은 무슨 뜻인가. 수솝과 무엇이 다른가. 어떤 향을 만들려는 브랜드인가. 제품 설명은 상세한데 브랜드 설명이 없다.
제품이 앞서 있고 브랜드가 뒤에 있는 상태다. 디퓨저·캔들·룸스프레이·섬유향수·기프트세트까지 이미 갖췄고 향도 여덟 가지나 개발했는데, 그것들을 하나로 묶는 문장이 없다.
4. 정가 52,000원, 판매가 21,600원
가격표에는 또 다른 신호가 있다. 실내 디퓨저 160ml는 정가 52,000원에 판매가 21,600원, 룸·패브릭 스프레이 100ml는 정가 40,000원에 판매가 15,400원이다. 절반 이하다. 반면 소이캔들은 30,000원에서 24,000원, 기프트세트는 45,000원에서 38,000원으로 할인 폭이 훨씬 작다.
같은 브랜드 안에서 할인율이 20%와 60%로 갈리면 고객은 정가를 기준으로 삼지 않게 된다. 이 상태가 길어지면 사람들이 기억하는 로에르의 가격은 52,000원이 아니라 21,600원이 된다.
그다음이 문제다. 언젠가 브랜드를 제값에 세우려 할 때, 고객이 기억하는 숫자와 브랜드가 바라는 숫자가 두 배 넘게 벌어져 있다. 할인은 재고를 움직이지만 가격 기억도 함께 옮겨 놓는다.
5. 답은 이미 제품 설명 안에 있다
흥미로운 것은 브랜드가 하지 못한 말이 제품 상세에는 이미 적혀 있다는 점이다. 식물성 곡물 발효 베이스, IFRA 인증 식물성 향료, 저자극·오일프리 처방, 그리고 반려동물이 있는 집에는 시트러스 계열 대신 벨벳 블라썸이나 시크릿 가든을 권한다는 안내까지.
이건 상세페이지 하단에 묻어둘 정보가 아니다. 향을 고르는 기준을 브랜드가 대신 정리해 준다는 뜻이고, 그 기준의 근거가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집에서 향을 팔아 온 시간이라는 뜻이다. 브랜드 문장으로 끌어올려야 할 내용이 상품 설명에 흩어져 있다.
6. 향이 아니라 장소를 파는 브랜드로
이미 갖춘 제품군을 보면 다음 방향은 어렵지 않게 보인다. 디퓨저, 캔들, 룸스프레이, 섬유향수. 향의 종류로 나열하면 그냥 홈프래그런스 상품 목록이지만, 장소로 나열하면 제안이 된다.
현관에는 디퓨저, 거실에는 캔들, 침실에는 룸스프레이, 옷에는 섬유향수. 같은 물건을 다르게 진열하는 것만으로 브랜드가 하는 말이 달라진다. 향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집 냄새를 의식하는 사람이 고객이 된다.
그리고 그 고객은 이미 존재한다. 현관을 열었을 때의 공기, 침구 냄새, 옷에 밴 요리 냄새, 반려동물이 있는 집 특유의 냄새. 이런 것을 신경 쓰는 사람에게 로에르는 향수 브랜드가 아니라 생활 관리 도구가 된다.
지금 로에르에 필요한 것은 아홉 번째 향이 아니라, 여덟 개의 향을 하나로 묶는 문장이다.